당신의 전성기, 오늘
  • 진행자: 김명숙 / PD: 신아람 / 작가: 조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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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품은 수요일 “김사인 시인의 ‘화양연화’” - 박준 시인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6-12-28 11:15  | 조회 : 7255 
YTN라디오(FM 94.5) [당신의 전성기 오늘]

□ 방송일시 : 2016년 12월 28일(수요일)
□ 출연자 : 박준 시인


시를 품은 수요일 “김사인 시인의 ‘화양연화’”


◇ 김명숙 DJ(이하 김명숙): 2016년 마지막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감사한 마음, 행복한 마음, 그리고 이렇게 또 한해가 가나 아쉽고 서운한 마음까지 다양한 마음이 드실 텐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시로 한해를 마무리 해보는 시간입니다. 시를 품은 수요일, 박준 시인 나오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박준 시인(이하 박준): 네, 안녕하세요.

◇ 김명숙: 올 한 해 박준 시인은 어떤 게 가장 행복했던 일로 기억되나요?

◆ 박준: 돌아보고 헤아려보면 행복했던 기억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이고, 주로 밤에 시를 쓰거든요. 그런데 밤부터 시작하면 주로 새벽이나 아침이 되어서 한 편이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면 그렇게 행복해요. 그런데 대부분 마음에 안 드는 시제가 써지니까 어쩌다가 마음에 드는 시가 써지면 되게 행복한데, 그 행복한 순간이 길지는 않아요. 다음날 보면 ‘내가 고작 이런 걸 써놓고 어제 좋아했던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요. 창작을 딱 하고 나면 순간은 좋아져요.

◇ 김명숙: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거기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축복이겠죠?

◆ 박준: 네, 그런데 저도 여쭤보고 싶은데, 김명숙 아나운서님은 올해 어떤 일이 가장 행복하셨나요?

◇ 김명숙: 저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지금 ‘당신의 전성기 오늘’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행복합니다.

◆ 박준: 네, 정답이지만 일반적인 답이었네요. (웃음)

◇ 김명숙: (웃음) 일반적이지만, 제가 오랫동안 방송을 쉬었고, 늘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게 되었고, 그것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늦은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새로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2016년을 보냈습니다.

◆ 박준: 그럼 제가 방금 한 말을 취소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제가 시를 써서 행복한 것처럼 같은 과정의 행복이네요.

◇ 김명숙: 네, 그래서 저는 정말 행복하고요. ‘당신의 전성기 오늘’을 함께 하시는 분들 중에도 저처럼 공백이 있거나,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을까? 망설여지시는 분들에게 정말 용기를 드리고 싶어요. 언제나 하고자하는 마음을 갖고 꾸준히 준비하시면 기회가 온다는 걸 제가 올해 체험으로 느꼈거든요. 그래서 함께 해주시는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느낍니다. (웃음) 질문 해주셨는데 답이 너무 길었네요.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저도 뻔한 질문을 하나 더 드릴게요. 한 해 동안 가장 감사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누가 있을까요?

◆ 박준: 제가 다방면으로 모자란 사람인데, 저의 모자람은 물끄러미, 고요하게 지켜봐주고 있는 아내에게 한 해 동안 가장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모자람을 성급하게 채우려고 하면 싸움이 났을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냥 지켜보는 거죠. ‘아, 모자라구나.’ 이렇게요. (웃음)

◇ 김명숙: (웃음) 아내분이 아주 훌륭하시네요. 그런데 우리가 한 해 동안 살면서 늘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되다보면 그냥 그렇게 시간이 가는구나 하다가도 해가 바뀔 때쯤이면 ‘아, 그래 또 새로운 한 해, 새로운 하루가 다가오는구나’ 하면서 선물 받은 느낌도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가는 세월 막을 수 없다’는 말도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올 한 해 보내면서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어떤 시가 있을까요?

◆ 박준: 방금 말씀처럼 가는 세월은 막을 수 없는데, 막지 못할 바에야 보내자, 하는 마음으로 김사인 시인의 ‘화양연화’라는 시를 골랐습니다. 이게 ‘어린 당나귀 곁에서’라는 시집에 수록된 시인데요. 시절을 보내는 것에 대한 마음이 담겨 있는 시입니다.

◇ 김명숙: 네, 김사인 시인의 ‘화양연화’, 박준 시인의 음성으로 들어보겠습니다.

◆ 박준: 네.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 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리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김사인, ‘화양연화’


◇ 김명숙: 네, 잘 들었습니다. 김사인 님의 ‘화양연화’, 박준 시인의 음성으로 들었는데요. 들으면서 왜 이렇게 마음이 애잔하고 짠해지는 느낌이 들까요?

◆ 박준: 이게 두 가지 감성이 느껴지는데요. ‘나와 함께 지낸 눈물겨운 날들이 나로부터 벗어나서’ 잘 가서 그때는 눈물겹지 않게 살아라, 하는 마음도 있고요. 또 한 편으로는 그렇게 비우고서 새로 맞이할 수 있는 것들, 슬픔의 감정이든 기쁨의 감정이든 비워야지 또 다른 슬픔이든 기쁨이든 올 테니까요. 그렇게 보내고 다시 기다리는 그런 마음이 담겨 있는 시 같습니다.

◇ 김명숙: 네, 올 한 해를 보내면서 나누고 싶은 시, 김사인 님의 ‘화양연화’ 전해주셨는데요. 그런데 이게 영화로도 있잖아요?

◆ 박준: 네 ‘화양연화’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을 뜻하는 사자성어인데요. 왕가위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하죠.

◇ 김명숙: 네, 요즘도 가끔 TV에서 볼 수 있더라고요.

◆ 박준: 요즘 아이들은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라고 있는데요. 그 그룹이 부른 노래를 떠올리더라고요. 저만해도 그 영화를 떠올렸는데요.

◇ 김명숙: 네, 세대가 바뀌면서 떠올리는 것도 바뀌는데요. 이렇게 해가 바뀌면 매년 교수들이 사자성어를 선정하잖아요. 뭔지 아세요?

◆ 박준: 저도 신문에서 봤는데, ‘군주민수’라고 하더라고요.

◇ 김명숙: 네, 맞습니다.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라는 뜻입니다. 강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인데요. 올해가 이런 대중의 힘을 누구보다도 느낄 수 있는 한 해가 아니었나 싶어요. 박준 시인은 올 한 해 어떻게 보셨나요?

◆ 박준: 저는 시인인데, 아직 시민은 덜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되게 재밌는 게, 시인이 되는 건 등단을 하면 되고, 신춘문예에 당선되면 되고, 또 되기 위해서 어디 가서 책도 읽고, 수업도 받으면 시인이 될 수 있는데, 시민이 되는 건 어디 가서 알려주는 곳이 쉽게 없죠. 그런데 저도 올 한 해 시민들이 많이 몰려있는 곳에 가서 그분들에게 시민이 되는 공부를 더 한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 김명숙: 그렇군요. 군주민수, 정말 생각해 봐야 하는 많은 뜻을 담고 있는데요. 이것과 관련해서 이번 청문회 때도 활약한 시인이 떠오르네요. 우리 도종환 시인, 다들 떠오르실 겁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 가운데 박준 시인이 낭독해 주셨으면 하는 게 ‘담쟁이’라는 시가 떠오르거든요. 이 시도 잠깐 소개해주시죠.

◆ 박준: 지금 시기와 앞서 말씀해주신 ‘군주민수’와 가장 관련된 시이기도 한데요. 벽의 담쟁이가 벽을 넘는 법을 잘 관찰했던 시인의 눈으로 다시 현실을 봤을 때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지점에 대해서 잘 쓰여진 시 같습니다.

◇ 김명숙: 네, 한 번 들려봐주시겠어요?

◆ 박준: 네. 그러겠습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대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놓지 않는다
자신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도종환, 담쟁이


◇ 김명숙: 네, ‘시를 품은 수요일’ 정말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시는 코너인데요. 추천시가 또 올라왔어요. 2235님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이 될 때마다 아쉬움이 많은데요. 다시 오는 새 해는 정말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화문 글 판에서 우연히 보고 찾아봤던 시입니다.” 이렇게 보내주시면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두 번은 없다’라는 시를 낭송해 달라고 문자 주셨어요. 폴란드 시인 인 것 같은데요?

◆ 박준: 네, 맞습니다. 폴란드 시인이고, 96년에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한 폴란드의 민족 시인인데요. 이 시인도 사회 현실을 잘 담고 있는 시이기도 합니다.

◇ 김명숙: 네, 오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를 박준 시인의 낭송으로 들으면서 오늘 시를 품은 수요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요. 끝으로 좋은 음성 다시 한 번 들려주시죠.

◆ 박준: 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ㅡ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 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내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으면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습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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