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전성기, 오늘
  • 진행자: 김명숙 / PD: 신아람 / 작가: 조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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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품은 수요일 “박성우 시인의 ‘삼학년’” - 박준 시인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7-01-25 11:26  | 조회 : 6267 
YTN라디오(FM 94.5) [당신의 전성기 오늘]

□ 방송일시 : 2017년 1월 11일(수요일)
□ 출연자 : 박준 시인

시를 품은 수요일 “박성우 시인의 ‘삼학년’”


◇ 김명숙 DJ(이하 김명숙): 설날이 다가오면 어른들은 걱정이 많죠. 귀성길은 이번에 얼마나 막힐지, 용돈은, 선물은 얼마나 드려야 하나, 친정엔 갈 수 있을까 등등. 하지만 아이들은 그야말로 동요처럼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폴짝’ 바로 이 마음처럼 설레겠죠. 오늘 <시를 품은 수요일>은 시와 함께 설이 마냥 즐거웠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볼까 합니다. 박준 시인 자리 함께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 박준 시인(이하 박준): 네, 안녕하세요.

◇ 김명숙: 이번 설 어떻게 보내려고 하십니까?

◆ 박준: 지난 연말부터 흥청망청 송년회, 망년회를 이어가면서 오늘만 살 사람처럼 지출을 많이 했어요. 이번 설은 좀 가난하게(웃음). 저도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 김명숙: 설이라고 하면 고향에도 많이 가는데요. 박준 시인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 박준: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나는 은평의 아들’이라고 하는데요. 서울 은평구입니다.

◇ 김명숙: 귀성길의 고통 없이 자라셨군요. 설날 가장 신나는 건 사실 아이들이죠. 새 옷도 입고 세뱃돈도 받고 온 친척이 모이니 사촌 형제들과 신나게 놀고요. 박준 시인도 어린 시절 설이 신났는지요?

◆ 박준: 시인으로 나와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런데, 저도 세뱃돈 받을 때가 제일 즐거웠어요. 저는 친가도 외가도 다 서울이라, 귀성길에 오른 적이 없어요. 대신 서울 토박이의 장점은 세종로, 광화문, 종로, 강남 등 혼잡하던 서울 도심이 명절엔 텅텅 비고, 거기서 노는 그런 재미가 있죠.

◇ 김명숙: 0977님께서 문자 사연을 ‘시골 동네 언니오빠들과 흰 가래떡을 아궁이에 구우면 새까맣게 얼굴과 손에 묻히며 장난을 치던 게 생각이 납니다’라고 보내주셨네요. 그리워지는 맛이죠. 요즘엔 설날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별로 보지 못했어요. 아이들을 위한 시 동시 중에는 사람들을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동시를 쓰는 시인들도 많죠?

◆ 박준: 네, 사실 동시라는 건 아이들의 마음을 잘 그려낸 건데 이게 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선입견이 없거나 더 넓게, 세밀하게 보는 시간이 시든 동시든 아이들의 마음이든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제가 오늘 가져온 시는 굉장히 재밌습니다. 삼학년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어떤 일을 신나서 벌이다가 그 일을 벌인 대가를 받게 되는데, 그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들으면 재밌으실 것 같습니다.

삼학년
-박성우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 김명숙: 이게 대가였군요. 이걸 들으면서 저도 비슷한 경험이 떠오르네요. 어렸을 때 뽑기가 있었는데 어머니께서 이걸 사먹지 말라고 늘 혼내셨어요. 그래서 제가 어머니가 안 계실 때, 국자에 설탕을 넣고 왔다갔다 만들어 보다가, 쏟고 불도 날 뻔 하고 해서 엄청 야단을 맞은 적이 있어요. 애청자 분들 중에도 이런 추억을 가지신 분 많지 않을까요.

◆ 박준: 지금과는 달리 말썽을 많이 부리셨군요.

◇ 김명숙: 말썽이 아니라 모두 경험해본 장난 아닐까요?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분만 아니라 외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분도 많을 것 같아요. 이런 분들과 관련해 예전의 시 중에서도 고향에 갈 수 없는 분들을 노래한 시들도 있을까요?

◆ 박준: 사실 1900년도 초기 시인은 숙명처럼 고향을 잃어야 했거든요. 강제이주든 유학이든 어떻든 간에. 많은 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하는 정지용의 <향수>. 이것도 정지용 시인이 일본 유학 중인 1923년에 자기 고향 옥천을 그리며 썼던 시고요. 그 시대의 시인 백석의 <고향>, 오장환의 <고향 앞에서>, 모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시인들이 썼던 시죠. 제가 오늘 소개드릴 시는, 그 이후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아픔이자 가장 큰 아픔일 텐데, 전쟁으로 실향민이 된 시편이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저는 오늘 김규동이란 시인, 함경북도 종성이 고향인데, 이분이 재밌는 게 자기 스승을 찾겠다고 1948년에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에 교복을 입고 그냥 판문점을 걸어내려 왔어요. 그때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지 못해서 한평생을 실향민으로 살다 가셨어요. 그 시인의 시를 가져 왔습니다.


-김규동

명산 아닌
그 산이
두어 점 구름 아래
조용히 누웠는 이름 없는 그 산이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햇살이 부서져
황금빛으로 물든
오솔길에는
빨갛게 익은 열구밥이
정물화같이
푸른 대기 가운데 고정되었다

바람과 짐승과 안개가
산 저편으로 잦아든 뒤
해 기울고
소달구지 하나 지나지 않는
신작로길이
영원처럼 멀었다

바다 우짖음 소리도
강물의 고요한 숨결도
알지 못하나
소박한 자태로 하여
쓸쓸한 기쁨 안겨주던 산
어린 나를 키워준 산이
탕아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시여
너의 고뇌와 눈물의 아름다움
그리워하지 않은 때 없으나
이룬 것 없이
죄만 쌓여
언젠가는 돌아가게 될
고향 하늘

아, 철없이 나선
유랑길
몸은 병들어 초라하기 짝이 없으나
받아주리라 용서해주리라 너만은
이름 없는 나의 산.

◇ 김명숙: 네, 김규동 시인의 <산>, 박준 시인의 음성으로 들어봤고요. 이번엔 우리가 교과서에서 만난 시 한 편 들어보는 시간인데요. 오늘은 어떤 시를 가지고 나오셨나요?

◆ 박준: 오늘은 설을 맞이해서 딱 들어맞는,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에>를 들고 나왔어요. 저희 또래가 중학생일 때 교과서에 실렸던 시일 거예요. 제가 오늘 이 시를 갖고 온 이유는, 설날이란 점도 있지만 김종길 시인이 현역 최고령 시인이세요. 현재 살아 계시는데 1926년에 출생하셨거든요. 아흔을 넘기셨죠. 지금도 활발하게 시작을 하는 노 시인의 덕담처럼, 대신 덕담처럼 들려 드리고 싶단 마음이 들어와서 가져온 시입니다.

설날 아침에
-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險難)하고 각박(刻薄)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 김명숙: 와, 김종길 시인의 <설날 아침에>란 시.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라고 하는데요. 저는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이란 대목이 마음에 꽂히네요. 오늘 낭독을 끝으로 박준 시인과 마지막 방송에 대한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저희가 3개월 같이 했죠?

◆ 박준: 네, 추운 시간을 함께 보냈네요.

◇ 김명숙: 추운 시간을 참 따뜻하게 보내주셨어요. 마지막으로 박준 시인을 모시게 돼 아쉽습니다. 그간 좋은 시 많이 소개해주시고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박준: 저는 다음에 시로 찾아오겠습니다.

◇ 김명숙: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시를 품은 수요일 > 박준 시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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