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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지방자치는?"-강응천 문사철 대표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4-05-20 10:32  | 조회 : 3302 
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세대와 시대의 봉우리를 넘어(세시봉) : 강응천 문사철 대표



앵커:
오늘도 문사철의 강응천 대표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강응천 문사철 대표(이하 강응천):
네, 안녕하세요.

앵커: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번 지방선거는 세월호 참사 때문에 전혀 사람들의 주목도 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조금 과거에는 어땠을까를 되짚어보죠. 지방자치라고 얘기할만한 것들이 옛날에도 있었나요?

강응천:
저는 정치를 잘 몰라서 자치라는 것이 뭔지 구체적으로 딱 떠오르지는 않는데 자치라는 것은 지배나 관리, 종속에 대비되는 말아니겠습니까?

앵커:
그럴 수 있죠.

강응천:
그런 의미에서라면 과거에 지방이라는 말, 향촌이라든가 군현 이런식으로 말을 했을 텐데 이게 중앙, 서울, 그러니까 임금이 사는 서울과 대비되는 의미를 가진 지역일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교과서라든가 사전을 찾아보면 지방이라는 말은 잘 안 나오고 지역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지역은 객관적으로 지리적인 특정한 구역을 가리키는 말임에 비해서 지방은 아무래도 서울과 대비돼서,

앵커:
비교적 독립성이 강조될 가능성이 있는 단어가 지방이다?

강응천:
그렇죠. 그리고 서울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국가대 국가라고 하면 범방이라든가 이런 것과 아마 대비되는 것 말일텐데요. 이런 것들은 국가권력이 미치지 않는 향촌사회, 예전에는 그런 데가 많지 않았겠습니까? 국가권력이 시시콜콜하게 모든 것을 지배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또는 국가가 아예 형성되기 전의 단계라면 몰라도 왕정시대까지는 지방자치라는 것은 거의 존재 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그렇다면 왕정시대 때 지방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해야하죠?

강응천:
지방은 마을도 있고 도시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예전에는 마을단위로 사람들이 살지 않았겠어요? 그러다가 마을끼리 통합이 되면서 국가라는 것이 형성이 되어갔을 텐데. 아무래도 국가가 형성될 때 주체세력이 있겠죠. 그러면 주체세력이 사는 마을 도시 여기가 중심이 돼서 서울이 되고 다른 곳들은 정복의 대상이었든지 아니면 통합의 대상이 돼서 주변부를 형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원래 독립적으로 살던 사람들이 통합이 되니까 아무래도 계속 경계의 대상이 될 테고 그리고 뭔가 눌러줘야만 서울을 존중하도록,

앵커:
슬쩍 눌러줘야만.

강응천:
그래야만 되는 그런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동양에서 보면, 중국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만 대체로 지방을 통합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었어요. 나라로서 등장하는 나라가 주나라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봉건제를 쓰지 않았습니까? 봉건제라는 것은 어쨌든 지방 사람들을 다 믿지 못하니까, 이게 언제 날 칠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자기 친인척부터 수도에서 가까운 친인척들에게 땅을 줘서 ‘네가 거길 관리하고 지휘하면서 나한테 봉사해라’ 이렇게 함으로써 서울에서 점점 더 멀어질수록 점점 자기와 피가,

앵커:
피가 점점 물이 타진다 그죠?

강응천:
그렇죠. 점점 물이 타져서 아주 바깥으로 나가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이민족이 지방이 되는 거죠. 이렇게 하는 게 나중에는 한나라를 거쳐 가면서 아예 중앙 집중적으로 바뀌죠.아예 다 중앙관을 내려 보내서 내가 직접 하겠다, 직접 지배하겠다는 방식으로 바뀌는데 친인척들도 나중에는 지방 세력을 동원해서 정권을 노리고 하니까 이것도 못 믿겠다 싶어서 나중에는 아예 중앙에서 관리를 보내서 통제하는 것을 군현제라고 하는데 이게 낯익은 단어죠? 고조선을 한나라가 멸망 시켰을때도 자기네들이 군현을 설치해서 자기들이 직접 지배를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는걸 보면 거꾸로 말하면 중앙이 오히려 늘 지방을 두려워하고 언제 나를 칠지 모르는 존재로써 경계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앵커:
그렇군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도 사실 지방이라는 것, 이 개념이 지금 말씀하셨던 대로, 나중에는 뿔뿔이 흩어지는 예를 들면 관리가 안돼서. 이런 사례들이 좀 있지 않았습니까?

강응천:
지방을 우리도 이제 자꾸 경계 하게 되고 그것을 어쨌든지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사례가 있었을 텐데 그러다 보니까 고려 태조죠, 왕건이 훈요 10조라는 것을 남기지 않습니까? 자기가 통치를 하고 나서 보니까 지방 세력들을 통합하고 고려왕조에 복속 시키는데 굉장히 많은 애를 먹었어요. 그래서 결혼도 되게 많이 했어요. 이민자들을 통합하기 위해서.

앵커:
결혼 많이 한건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강응천:
자기에게 어쨌든 친인척 관계를 맺어서라도 지방을 복속시키기 위해서. 그러다가 이런 걸 많이 겪고 나서 죽을 때가 되니까 자기의 가까운 관료를 불러다놓고 자기 후손들에게 고려라는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지시사항, 유언을 남깁니다. 그중에는 불교를 존중하고, 북진정책을 써라 등등의 이야기도 있지만 그중에 우리 이목을 끄는 게 왜 차령이남,

앵커:
그런데 그게 위작일 가능성이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 같던데.

강응천:
이게 일본사람이 한 얘긴데, 나중에 후대에서 임금이 만들었다는 건데 그런데 그건 지금도 논란이 있어요. 그 문제에 대해서. 어차피 진짜 왕건이 작성했는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어쨌든 후대에 만들어서 넣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쨌든 그 내용자체가 차현, 그러니까 차령이남 그리고 금강바깥에, 그러니까 지금은 충청남도 이남의 호남지방 까지를 포함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이 지방은 지세가 배역하니까 등용하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혹자는 그때부터 호남차별을 했다는 둥 말을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만약에 그것이 위작이든 후대에 왕이 만든 것이든, 왕건이 직접 만들었든지 간에, 거기는 견훤이 예전에 위세를 떨쳤던 지역이지 않습니까? 후백제라는 나라가 있었던 곳이고 신라는 자발적으로 복종 해왔지만 후백제는 전쟁을 통해서 정복을 해왔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경계한 것이 아니었을까 했는데 사실은 이런 것이 우리가 이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지방이라는 것은 본래는 다른 나라였던 거예요. 그러니까 각각의 마을들에 살다가 서로 조그마한 나라를 이루고 살다가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쭉 거쳐서 우리나라는 보통 삼국시대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까지 합쳐서 이런 나라들로 통합이 되어갔던 거거든요. 이게 다 신라로 통합이 되고 신라 후에 삼국이 분열됐다가 이게 고려로 최종적으로 통일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계속 그 이전에 자기가 통합했던 나라들이 있던 지역은 계속적으로 중앙이 볼 때는 위험한 지방이 되는 거죠. 그리고 지방 사람들도 우리가 정치적으로 너희에게 통합이 되어있을 뿐이지 우리의 뿌리는 다르다, 우리는 다른 문화를 계승했고 다른 전통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백제의 후예다, 나는 신라의 후예다 이런 의식이 고려왕조가 지속되는 동안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는 거죠. 그래서 학계에서 분리 계승의식이라고 보통 말을 하는데. 이런식의 분리 계승의식이 계속 존속했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상수리제도라고 하고, 고려 때는 기인제도라고 하는 중앙관을 내려 보내서 관리하기도 하고, 지방호족의 유력자제들을 인질로 중앙에다 잡아다 놓고 집안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이런 제도들을 쓰기도 했던 것이죠.

앵커:
지금 말씀하셨지만 이광수의 소설이죠 <마의태자>. 그런데 마의태자가 실제로 그렇게 소극적으로 나라가 망했네 하고 산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오랫동안 세력을 규합해서 저항운동을 펼쳤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강응천:
그렇습니다. 지금도 실제로 강원도 쪽으로 가보면 실제로 마의태자가 이끄는 신라의 저항군이죠, 끝까지 고려와 싸워서 고려군이 추적했던 장수에 관한 설화가 남아있는 지역들도 있고요 유적들도 있고. 이게 발전하면, 그런 건 거의 전설이나 설화에 해당합니다만, 나중에 여진족이 일으켜 세운 금나라가 금이라는 것도 신라의 김씨의 후예다, 마의태자의 후예가 저쪽 산맥을 넘어서 고려에 복수하기 위해서 금나라를 세웠다 라는 말까지 만들어지는데 그런 것이 영향을 준 것이죠.

앵커:
그렇군요. 그런데 이게 언제 해소돼요?

강응천: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합의가 돼있는 것 같은데요. 고려 말에 가서야 해소가 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것도 언제냐면 몽골이 처 들어왔을 때 있지 않습니까? 몽골제국이 워낙 강대국이었으니까. 사상 유례 없는 세계제국 아니었습니까? 그런 군대가 들어오니까 나라가 그야말로 풍전등화죠. 이런 상황에서 나는 신라계다 나는 가야계다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민족이 송두리째 다 없어질 위기 앞에서. 그때 도대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이렇게 침략을 받으면서도 버티는 우리는 뭐냐, 그리고 우리는 중국과 구별돼서 어떤 특징이 있느냐를 사람들이 고민하게 되었다고 해요. 이를테면 <동명왕편>이라든가 일연의 <삼국유사>라든가 이런 것들이 모두 다 그때의 민족의식, 동료의식을 찾기 위해서 만들어진 거고 그러면서 그때 발견한 게 단군이라고 해요. 그 이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각 자기네들의 시조가 있지 않았습니까? 단군이 자기들의 시조가 아니었거든요.

앵커:
뭐 알에서 태어나고..

강응천:
그렇죠.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서 우리가 동료의식을 강하게 갖게 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초월하는 우리의 조상이 뭐냐는 이러한 과정에서 단군이 재발견 된 거죠.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에 있었던 한반도 삼한지역의 나라. 그때부터 우리가 공통의식을 갖게 됐고 결국 조선이라는, 과거 단군이 세웠던 나라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조선의 건국으로 귀결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으로 보고 있죠.

앵커:
조선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지 여러분 궁금하시죠? 여기서 부터는 다음 주에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응천:
네 고맙습니다.

앵커:
지금까지 문사철의 강응천 대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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