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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 대사헌이었던 조광조가 살아나서 지금의 언론을 본다고 하면 이것이 언론이냐고 말을 할 것 같아"강응천 대표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4-05-13 10:31  | 조회 : 5528 
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세대와 시대의 봉우리를 넘어(세시봉) : 강응천 문사철 대표



앵커:
역사가 말해주는 현재, 바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간이죠. 세대와 시대의 봉우리를 넘어서 바로 세시봉시간입니다. 오늘도 문사철의 강응천 대표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시죠.

강응천 문사철 대표(이하 강응천):
네, 안녕하세요.

앵커:
오늘은 언론에 관한 얘긴가요? 과거에도, 조선시대에도 언론이 있었나요?

강응천:
언론하면 교과서에서 배울 때, 한성순보 이게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다 독립신문이 최초의 한글신문이다 이런 것은 아마 교과서에서 배우셨을 텐데 그렇다면 근대 이전에 언론이라는 게 있었느냐는 생각을 많이 하실 거예요. 그런데 실제로 언론이라는 것은 그전에 만들어진 용어이고 실제로 그게 있었습니다. 지금도 언론과 검찰을 쌍두마차로 하면서 권력을 견제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가진 집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는 왕정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론과 검찰이라는 기능을 가진 두 기관이 체제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핵심 권력기관이었다는 것은 지금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저희가 오늘 언론이야기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세월호 참사의 문제를 보는 언론의 시각이 언론마다 다르고요. 어쨌든 언론들도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데. 그렇다면 옛날의 언론은 뭘 말하는 거예요?

강응천:
지금의 언론은 권력이라든가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서 국민의 권리를 대변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고 있죠. 하지만 왕정시대에는 그렇게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언론기관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죠. 모든 것은 관으로 편재되어서 왕 밑의 신하로서 기능을 합니다. 이것은 중국에서부터 유래된 건데 보통 중국에서는 언론과 검찰기구를 하나로 묶어서 대간이라고 옛날부터 불렀어요.

앵커:
대간?

강응천:
어사대의 ‘대’하고 사간 간원의 ‘간’자를 합쳐서 ‘대간’이라고 한 것인데. ‘대’가 지금의 감찰기구 검찰이고 ‘간’이 간쟁한다고 해서 언론기관이죠. 이게 발전해서 조선시대에 이르면 그 중에 어사대에 해당하는 검찰기관이 사헌부가 되고 그 다음에 간쟁을 담당하는 간원이라는 것이 조선시대에 사간원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사간원에 하나 플러스 되어서 홍문관이라는 관청이 있었어요. 홍문관이라는 것은 왕명을 출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거기서도 언론을 담당해서 사간원과 홍문관을 묶어서 언론기관이라고 부르고 여기에 사헌부까지 합쳐서 보통 3사라고 부르거든요? 이 세 기관이 말하자면 왕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비판하고 국가의 기율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왕도 상당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앵커:
독립성과 자율성. 그렇다면 사실은 바른말도 하고 이랬다는 것 아닙니까?

강응천:
그렇습니다. 일단 왕이 자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면 그 체제가 오래갈 수 없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왕이 정치를 제대로 해야만 하는데, 독재로만 흐르면 안 되니까 이것을 제어하고 뭔가 잘못된 게 있으면 그것을 브레이크를 걸어야하고. 실제로 사헌부라는 곳에서는 왕 또는 고관들이 비리가 있으면 그것을 감찰해서 적발해 내는 것이 체제를 지탱하는데 중요한 요소였단 말입니다.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야말로 이것에 목숨을 걸게 하도록,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도록 체제가 그것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조선왕조가 500년 못 갔겠죠.

앵커:
목숨을 건다, 체제를 보장한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체제가 보장을 해야만 자기 체제가 유지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느 선까지 되는 겁니까? 체제를 부정하면, 체제를 보장하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거니까, 그죠?

강응천:
그렇습니다. 왕이 유일한 주권자고 왕이 주인이라는 근간을 흔들지는 않겠죠. 그렇지만 적어도 왕에게 부여된 권한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도록. 조선시대 때 성리학의 원리라는 것은 의민정치 아닙니까? 민이 근본이라는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목숨을 걸고 한다는 것에는 이런 말이 있어요. ‘신하가 왕의 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도학을 따르는 것이다.’ 성리학의 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왕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왕 자신도 넘어설 수 없는 성리학의 원칙을 따르는 한에서만 그를 존중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간쟁을 하는데, 잘못된 경우에는. 그것이 개인의 용기라든가 심정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집단적으로 하는 거죠. 사실은 언론이나 시스템을 만들어서 이 시스템이 개인, 언관에게 목숨을 걸 수 있도록 보장을 해주는 건데요. 그런 장치중 하나에 ‘피혐’이라는 게 있어요. 혐의를 피한다는 이야기인데 말하자면 사간원 관리들 중에서 전체 다수의 의견이 어떤 대신이나 왕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는데 거기에 대한 의견이 다를 수가 있어요. 또는 연줄에 얽매여서 혐의를 받는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그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서 스스로 사직을 청합니다. 퇴직을 시켜주십시오, 벼슬을 다른 데로 바꿔주거나 그만두게 해 주십시오 라고해요. 안 그러면 이 사람은 사간원 내부에서 왕따를 당합니다. 그러면 큰일 나는 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해야 하고 이 사람이 물러나면 그다음 후임자가 또 같은 소리를 계속 간쟁하고. 이런 식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왕이 됐다, 너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사직서를 몇 번이나 내면 관철시키고 그러면서 사간원 전체가 바른말을 하기 위해서 똘똘 뭉치는 형태를 계속 몰고 가는 거죠. 그러면서 집단적으로 목숨을 거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앵커:
오늘 화요일이기 때문에 강응천 대표와 역사와 현재를 뛰어넘는 세시봉 함께 하고 계신데요. 지금 말씀하셨듯이 5120님도 ‘과연 조선시대 언론들이 왕권에 도전하고 사회를 강하게 비판했었나’하는 질문도 해주셨고요 2103님 ‘조선시대에도 외신이 있었는지?’ 라는 질문을, 있을 수 있죠. 중국에서 들어오는 게 외신 아닙니까?

강응천:
그렇죠. 사절단의 교류를 통해서 서로 의견이 왔다 갔다 하고. 주로 우리는 아무래도 명나라의 제후국이었으니까 그쪽에서 여러 가지 지시사항 같은 것들이 많이 왔었죠.

앵커:
아까 이야기 잠깐 계속 해서요. 예를 들어서요 왕에게 어느 정도 강하게 얘기할 수 있었는지?

강응천: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왕이라고 해서 그 사람 말을 따르는 게 아니다, 왕 위에 도학이라는 원칙이 있는데 15세기 16세기 이래에 정해진 원칙인데. 왕도 거기에 어긋나면 간쟁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조선시대에 반정이 2번이나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왕을 갈아엎는. 이것이 다 거기서 가능했던 것인데. 우리가 연산군이라는 폭군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 앞에서 무슨 간쟁이 있고 언론이 있었겠느냐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런 시대에도 조순이라고 당시 사간원 정언벼슬을 하는, 좀 하찮은 벼슬이죠, 그런 벼슬을 하는 사람이 당시 노사신이라는 영의정을 역임했던 고관이 있어요. 이 사람이 아마 연산군 쪽에 붙어서 신분이 낮은 관리들에게 밉보인 일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사간원 조순이라는 사람이 왕에게 상소를 올려서 뭐라고 했느냐면 ‘노사신의 살을 씹어먹고 싶습니다’ 라는 말까지 상소에 적어요.

앵커:
어휴 좀 잔인하네요.

강응천:
막말인데 그런 말을 고관에 대해서 하니까 연산군이 뭐라고 하냐면 네가 대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너를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구나 라고 하면서도 어쩌질 못합니다. 왜냐하면 대간이라는 것이 보장되는 기관이고 게다가 시스템적으로 저항을 하니까, 한명 잘라낸다고 해서 저항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조선시대 때는 언론은 무서웠다는 거죠.

앵커:
그래서 결국 다 무사한 모양이죠?

강응천:
그때 이 사건자체는 그냥 넘어갔어요. 쌓이고 쌓여서 연산군이, 물론 자신의 어머니 문제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자기가 쫓겨 날 정도의 폭정을 저지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연산군이 쫓겨난 다음에도 그 시스템은 여전히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새로 임금이 된 중종이 되살려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시스템을 유지해갔기 때문에 사간원을 중심으로 한 언론이라는 것이, 조선시대의 특징적인 정치구조가 있는데 그것을 군신공치라고 하더라고요? 군과 신하가 같이 다스린다. 임금 혼자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만드는데 언론이 발판이 되었다고 봅니다.

앵커:
그렇군요. 이런 상황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다른 왕정이 있었나요?

강응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중국에서 대간제도는 시작이 된 거예요. 대간이라는 언론과 검찰기관이 건재해야 시스템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일치감치 황제 독재체제가 자리를 잡았어요. 그러니까 황제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오래 발달하다 보니까 중국에서는 이러한 대간보다는 환관 우리가 내관이라고 하는 환관이 중국에서는 굉장한 권력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황제 옆에서 좌지우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나라는 조선시대는 특히 군신공치라고 해서 왕이 그렇게 권력이 세지 않으니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조선시대 때 권력을 부렸던 환관, 내관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는 언론을 담당했던 하급관료의 힘이 강해서 그 쪽에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게 되었던 겁니다.

앵커:
저는 이걸 보면서 어떤 생각이드냐면 확실히 동양은 서양의 기준으로 시대나 국가형태를 논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이. 서양에서는 절대국가 이야기하는데 절대권력을 휘두르는 건데. 그게 봉건시대의 마지막이다 근대국가의 초기다 그것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절대국가와 조선시대나 이건 완전히 다르네요?

강응천:
학자들에 따라서는 다르긴 하지만 절대국가의 논리중 하나가 왕권신수설 또는 짐이 곧 국가다라는 루이14세의 말을 많이 하는데 이건 동양의 전제국가 전제에서 보면 애들 수준의 거라고나 할까요? 수천년 간의 왕정중심의 국가가 다져진 가운데 특히 조선같이 언간이라는 것의 역량이라든가 왕이 최대한 보장해 줬다고 하기 보다는 국가가 사대부를 중심으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그런 시스템을 만든 거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중국의 송대, 우리로서는 고려에 해당하는데 그 시대부터 동아시아는 근대로 봐야한다는 학자들도 있죠.

앵커:
물론 왕과 국가의 동일시 현상은 장 보댕이 주권이라는 개념으로서 우리가 얘길 할 수 있는 건데 언론얘기로 돌아가서 조선시대언론과 지금의 언론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강응천:
조선시대의 언론이야길 하면서 그때도 상당히 강직한 언론이 있었네 라고 청취자들이 들으실 텐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한계는 명확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주권자는 유일하게 왕일 뿐이고 그 왕을 도학정치 원리에 맞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면서 언론인들이 속했던 집단, 사대부 계열이겠죠? 사대부계층의 이익을 도모하는 선에서 강직한 언론을 폈던 겁니다. 지금의 언론은 그러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정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은 국민주권 시대고 국민의 권리를 수호해야하는 집단이라고 한다면 조선시대 때 보다 훨씬 더 많이 진보되어 있어야 하고 더 날카롭고 목숨을 걸고서라도 국민의 권익을 지켜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솔직히, YTN도 언론입니다만, 요즘의 언론이 비판대상에 오르고 있는 구설수를 들어보면 조선시대의 기준에서 봐도. 예를 들면, 조선시대 때 대사헌이었던 조광조가 살아나서 지금의 언론을 본다고 하면 이것이 언론이냐고 말을 할 것 같아요. 만약 조선시대의 그런 언론인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대단히 창피하다고 생각해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 하거든요? 저는 그런 점에서 비록 먼 옛날의 역사이지만 지금 특히 요즘 세월호 참사 때문에 더 언론에 대한 반응이 예민한 측면이 있는데 이것을 더 겸허히 받아들이고 총체적으로 언론 일반이 반성해야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3712님이 보내주신 문자 인데요 ‘일제 강점기 시대 때 언론의 기능이 그때 본격적으로 발휘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목숨 걸고 바른 소식을 전하던 우리나라 초기 언론인들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라고 질문해주셨는데 일제 때도 사실 굉장히 나름대로 목숨 걸고 하는 언론들이 있었죠?

강응천:
일제에 들어가서 모든 한국말 하는 언론을 금지했죠. 그래서 1910년대에는 강압정치 속에서 사실 지하언론만이 기능을 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인 신채호나 박은식이나 임꺽정을 쓰신 홍명희 선생은 사실 언론사에서 다 일하셨던 분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1920년대, 3.1운동 이후에 유화적인 흐름 속에서 한국말을 하는 신문들을 허용을 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금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1920년대에 나왔죠. 그 이후에 언론인들이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일본인들이 보도하지 않는 독립운동 소식이나 민생에 관한 소식들을 열심히 전하던 전통은 있었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어쨌든 언론이 사회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그리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만 여러 가지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강응천: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목숨을 걸었다고는 하는데 그런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민의 편에서 국민들의 국가의 주인 됨을 신장시키는 쪽에서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요즘은 무슨 말을 해도 죽이지는 않죠. 그러니까 목숨을 걸 일도 없는데. 문자 하나만 더 소개 해 드릴께요, 1266님이 보내주셨는데요. ‘이번참사를 보면서 직업윤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 합니다 언론인이든 선원이든.’ 이것도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오늘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응천: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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