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플러스
  • 방송시간 : [월~금] 15:00~16:00
  • 진행 : 김우성 / PD: 김우성 / 작가: 이혜민

인터뷰 전문

<인터뷰1> “선장은 도망쳤지만 내 동생은 끝까지 남아 학생들 지켰다“-세월호 사무장 양대홍씨 형 양대환씨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4-04-18 17:38  | 조회 : 9461 

앵커:
세월호 침몰 대참사,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 속에 있는데 생존 소식을 기다리는 부모님들의 애타는 목소리, 정말 저도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승객들을 버려두고 배에 올라탄 세월호 이준석 선장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죠.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의 사고 대응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보도가 이어지고 있는데요. 모두 그런 것으로만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승객 구조에 앞장 선 직원들이 있었는데요. 세월호의 사무장 양대홍씨도 그 중의 한 분입니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양대홍씨가 실종 상태인데요. 침몰 당시에 양대홍씨와 통화를 했던 형님 양대환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양대환씨, 잘 들리십니까?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씨 형 양대환씨(이하 양대환):
네.

앵커:
죄송합니다. 일단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면서도 이렇게 인터뷰를 부탁드리는 마음이 상당히 무겁습니다. 지금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서 안타까우실 텐데요. 양대홍씨는 지금 세월호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요?

양대환:
사무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앵커:
사무장이면 전체적인 관리를 맡고 있는 그런 위치겠죠? 아직까지 실종 상태고요.

양대환:
네.

앵커:
그러면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자녀가 있나요?

양대환:
네. 아들이 둘 있습니다. 고 3, 중 2.

앵커:
예, 그렇군요. 그런데 형님께서 전화를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양대환:
전화를 받은 게 아니고요. 제가 했습니다. 사고 난 직후, 시간은 제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고요. 우리 직장의 직원 한 사람이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TV를 안 봤기 때문에, 동생 분이 세월호 사고가 났다는데 혹시 동생 분이냐고 해서 맞다고 하고 그 뒤로 바로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앵커:
그래서 통화를 하셨고요. 그게 그럼 사고 난 직후쯤이었나요?

양대환:
아마 시간이 조금, 오전 9시 30분 경 쯤 되었을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에는. 제가 9시에 근무를 시작했기 때문에요. 9시 2~30분 대로 제가 기억이 되는데요.

앵커: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를 나누셨을까요?

양대환:
다른 얘기는 못 나눴고요. 솔직한 마음 같아서는 그냥 너만 살아라, 이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러나 그 많은 학생들, 그 많은 승객들 생각했을 때 제 양심상 그런 말이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안 나왔고, 마음속으로일 뿐이고 잘 해라, 잘 해라, 이렇게만 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형님, 하고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앵커:
정말 안타까운 소식인데요. 얘기를 나눴던 그게 다시 떠오르시도록 한 것도 저도 좀 많이 안타깝습니다. 전화상으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긴 합니다만 그 상황이 굉장히 위급하게 느껴지셨겠네요?

양대환: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앵커:
아이들을 구하러 간다고 하시던가요?

양대환:
그 얘기는 저한테는 안 했고요. 동생 부인이니까 저한테는 제수씨 되죠. 보도 상에서 물론 선장이나 그런 분들은 탈출을 시도를 했고 저도 욕을 하고 그런 부분은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말은 안 나올 거고 기분도 좋지 않은데, 제수씨 얘기를 들으니까 제수씨도 직장을 다니느라고 그 얘기를 몰랐습니다, 사건 내용을. 그런데 제수씨 동생, 그러니까 애들로는 외삼촌 되겠죠. 외삼촌이 전화가 왔답니다, 매스컴을 보고. 누나, 매형이 그렇게 됐다는데 알고 있냐고, 그래서 그 때가 시간대가 10시 3분대에요. 2분에 전화를 했답니다, 제수씨가. 그러니까 통화중이었답니다, 그 때는. 그래서 3분에 다시 했답니다, 1분 후에. 다시 하니까 수협 통장에 돈이 입금되었으니까 큰아들 학비 내라고 그랬고, 그래서 제수씨가 다시 물었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떠냐고. 지금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되니까 동생이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되니까 전화 끊어, 라고 하고 바로 끊었답니다. 그게 마지막이었답니다.

앵커:
10시 3분에 통화했던 그 때가 마지막이었고요. 예. 아이 등록금을 하라고 얘기를 하신 걸 보니까 상당히 다급한 상황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은 드는데요. 그러면 그 이후로는 전화 통화를 다시 시도를 해보셨다거나 아니면 문자 메시지 주고받거나 했던 건 없으셨나요?

양대환:
주고받은 거는 없고요. 제가 메시지도 넣고 전화도 계속 했습니다. 다음날까지도 계속 했고, 그런데 그 다음날 새벽에요. 새벽에 제가 솔직히 잠을 못 잤습니다. 잠도 오지도 않고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형님, 그게 자꾸 떠올라가지고 마지막 통화, 그게 많이 떠올라가지고 잠도 안 들고 해서 새벽에 또 전화를 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통화중이라고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래서 다시 한 번 더 전화했더니 또 마찬가지로,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요. 30초 내에 그렇게 신호가 가고 끊어지는 것은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전화상에 물이 들어갔거나, 그러면 그렇게 나온다고 하네요. 저도 그걸 알려고 많이 그렇게 노력했는데 그거는 어떤 사람이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그랬을 것 같아요.

앵커:
그러면 지금 동생 분 양대홍씨가 청해진해운에서 언제부터 근무를 하면서 배를 타셨는지 알고 계신가요?

양대환:
한 4년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청해진해운에 있었고요. 지금 세월호는요. 보도 상에서도 나왔지만은 지난 해 3월부터 출항한 걸로 되어 있죠? 그런데 그 전에는 오하나마호라고 또 한 대가 있죠, 제주로 가는. 거기에 처음에는 선원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세월호가 도입된 이후로 거기서 하여튼 수리고 뭐고 고생 많이 했어요. 전라남도 목포항에서 배를 전체적으로 수리를 하고, 저하고 통화도 자주 했습니다. 힘들다고, 겨울에 춥기도 하고, 형님, 내가 이렇게 굉장히 춥다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네 일이니까 끝까지 해라, 하고 배를 다 수리하고 어떻게 보면 여기 와서 사무장이라는 직책으로 진급이 된 것 같더라고요.

앵커:
진급이 되셔서 이쪽 배를 타고 일을 하신 거죠.

양대환:
네. 그런 선원 일은 4년 한 걸로 얘기를 들었습니다.

앵커:
원래도 이렇게 사명감이 있고 책임감이 강하신 그런 성격이셨나요?

양대환:
제가 지금 이렇게 말을 하면 동생이라고 편을 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데요. 책임감이 보통 강한 게 아닙니다. 자기를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그렇게 하고, 제 동생이지만 정말 어쩔 때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살아오면서 제가 장남이고 동생이 막내인데, 저 동생은 저렇게 똑똑할까, 저렇게 일 처리를 잘 할까, 무엇을 하나 제가 집안일을 시켜 놓으면요. 척척 정말 내가 기쁠 정도로 일을 해 놔요.

앵커:
그렇군요. 평소에도 굉장히 책임감 있는 그런 것들을 많이 보여주셨던 분이라 아무래도 아이들, 승객들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마음으로 임하셨던 것 같아요.

양대환:
예. 그런 것도 있고 또 자기 아들도 있으니까 똑같은 아들, 딸이겠죠. 그런 마음이 더 앞섰을 것 같고, 제가 지금 그 상황에서요. 몇몇 확인이 되었습니다. 매형이라는 사람도 통화를 했고요. 누나라는 상황도 통화를 했고, 몇몇 사람이랑 통화를 했는데 다들 나오라고 했답니다, 빨리. 빨리 너라도 살라고, 나오라고, 그렇게 했답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나는 해야 된다고 그렇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랬답니다. 안심을 시키고, 그 상황에서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랬답니다.

앵커:
이 세월호에 지금 방금 말씀을 해 주셨지만 학생들이 거의 타고 있었잖아요? 이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서 동생분이 달려가셨는데, 마지막까지 희망은 버리지 않으셨으면 좋겠고요. 동생분에게 그래도 하지 못했던 말,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양대환:
그런 말들은, 제가요. 아까도 얘기를 했지만 우리가 형제가 5형제인데 어떤 집안에 일어나면 저는 지시하고 동생은 일 처리 하고, 이런 식이었어요. 정말 그래서 어떻게 저렇게 얘는 일을 똑부러지게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 봤습니다. 아무튼 제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상황에서요. 저도 지금 동생이, 기대는 걸고 있지만 희망은 없습니다. 저도 그렇게 판단을 하고, 어찌됐든 죽음을 맞았더라도요. 떳떳한 일을 했고, 끝까지 잘 했다고 봅니다, 저는.

앵커:
네, 선장보다 더 선장다우신 분이었죠.

양대환:
예. 최선을 다 했고, 미련 없이 했다고 봅니다. 동생, 내가 동생 속에 들어있는 마음은 아니지만, 내가 판단했을 땐 지금까지, 동생이 지금 46살인데요. 저하고 11년차 납니다. 살아온 과정에서 하여튼 떳떳했다고 생각하고 제가 어제 동생 큰아들한테도 너희 아빠는 떳떳하게 끝까지 최선을 다 했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앵커:
끝까지 희망은 버리지 마시고요. 지금 계속 구조 작업이 진행이 되고 있고요. 그리고 실종자 가족들, 또 학부모들은 정말 애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께 동생 대신...

양대환:
제가 말씀 드릴게요. 제가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저도 사실상 그 사건 이후로 지금 잠을 못 잡니다. 그런데 그 분들한테 뭐라고 제가 해야, 어떤 얘기를 해야만이 위로가 될까를 계속 생각을 해 봤는데, 죄송하다는 말 갖고 되겠습니까? 그런 말은 표현도 안 되고, 어떤 식으로든 내가, 하여튼 정말 죄송해서 어떤 말씀을 드릴 수도 없고,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마시고 끝까지 한 번 기다려봤으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그걸로 표현도 안 되지만은 어떤 식으로든, 나 하나 희생이 되어서 그 사람들이 다 살아올 수 있다면 정말이지, 진심인데요.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런 생각이고, 정말 안타깝습니다. 동생은 자기 의무, 자기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동생은 두 번째 치더라도 지금 실종자들이 한 사람들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살아 왔으면 좋겠어요. 그 말 밖에는 어떻게 더 표현할 수가 없네요.

앵커:
저희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구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고요. 그런 책임감이 우리에게 그래도 희망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상당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양대환:
그리고요. 또 한 마디하고 싶은데 지금 사고 현장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이요. 정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굉장히 바다에서 힘드실 텐데 고생하신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앵커:
최선을 다해주시기를 정말 바라고 또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양대환:
예, 감사합니다.

앵커:
세월호 사무장인 양대홍씨의 형 양대환씨와 얘기 나눠봤습니다.


[저작권자(c) YTN radio 무단전재, 재배포 및 AI 데이터 활용 금지]
  목록
  • 이시간 편성정보
  • 편성표보기
말벗서비스

YTN

앱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