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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싸우기 위해 구세군에 가입했던 조선 청년들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5-12-02 11:36  | 조회 : 4440 
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히스토리 인 뉴스’

□ 방송일시 : 2015년 12월 2일(수요일)
□ 출연자 : 전우용 역사학자



◇ 신율 앵커(이하 신율): 시간이 참 빠르죠? 벌써 2015년의 마지막 달입니다. 바로 어제부터 구세군 자선냄비가 시내에 등장했는데요.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는 구세군의 자선냄비, 이 자선냄비 보면서 겨울에 우리 이웃들을 다시 한 번 따뜻하게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만든다는 면에서도 아주 의미 있는 존재인데요. ‘히스토리 인 뉴스’, 오늘은 바로 역사 속의 구율, 기부문화, 구세군에 대해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전우용 역사학자(이하 전우용): 네, 안녕하세요.

◇ 신율: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나라가 나서서 개인의 빈곤이나 이런 것들을 구제하려는 노력이 있었죠?

◆ 전우용: 굉장히 역사가 길죠. 고구려 시대의 진대법이라고 하는 것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국가적 구휼제도고요.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이어져오면서 의창이나 상평창처럼, 명칭은 바뀝니다만 기본적인 방식은 가을에 국가가 세금의 형태로 쌀을 거두어서 보관하고 있다가, 봄철에 굶주리는 사람이 나올 때 빌려주어서 당장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가을에 추수가 되면 다시 거두어들이는 방식의, 쌀을 꾸어주는 방식으로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거죠. 이런 방식은 거의 우리 역사 전 기간이 진행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 신율: 그런데 어느 정도 진짜 필요한 전국 방방곳곳에 영향을 미쳤냐는 것 아니겠어요?

◆ 전우용: 행정력이 그렇게 미치지 못해서 어려운 점도 있었고요. 무엇보다도 지금도 그런 현상이 조금 나타납니다만 불우이웃돕기나 긴급재난성금을 보냈는데, 성금의 전액이 아니라 상당부분이 중간에 세고, 일부만 전달된다고 하고요. 그런데 그게 어느 나라나 어느 시대에 있었던 일이죠. 예컨대 조선 시대에 환곡제도가 대표적이었는데요. 필요하지 않은 데 꿔주고, 고리를 붙여서 가을에 징수하고, 꿔줄 때는 썩은 쌀이나 겨가 섞인 쌀을 주고, 받을 때는 햇곡식을 꼭 챙겨서 받고, 이런 것 때문에 굉장히 심각한 사회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고요. 이른바 구휼제도를 핑계로 한 수탈이 삼정의 문란의 핵심 중 하나로 떠오르기도 했을 만큼, 구율제도를 운영하는 과정에도 비리나 농간이 작용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 신율: 그렇군요.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나눔, 백성들이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이런 것도 있었겠죠?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많았을 것 같은데요.

◆ 전우용: 인정이라고 하는,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돕는 영역은 기부라고 볼 수는 없는데요.

◇ 신율: 그렇죠. 나눔이죠. 나눔.

◆ 전우용: 일종의 보험이라고 봐야죠. 상대방이 어려울 때 도와주면 자기도 같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가 나누는 풍습은 국가의 형성 이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고요.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빈부가 나뉘고, 사회적 계급이 나뉘고, 이랬을 때 어떤 사회적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겠죠. 고대사회에서나 중세사회에서나 이런 문제에서 기능했던 것이 종교기관이고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부자들이 죽기 전에 상당액을 사원에다가 시주하면, 절이 그 재산을 가지고 빈민을 구제하는 사업을 국가와 별도로 한다든가 하는 시스템이 굉장히 오래 전부터 있었고요. 각 지방의 지주들이 흉년을 당해서 자기 지방 소작인들이 굶주리거나 아사 직전에 있다고 하면 가진 쌀을 풀어서 긴급 구제하고, 또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가을철에 살만 하며 소작인들이 정해진 것 이외에 조금 더 돌려주고, 이런 방식의 사적인 구휼행위는 보편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신율: 그 말씀 들으니까 경주 최 부자인가요? 그 생각이 나네요. 그 사람들도 어려울 때 많이 베풀었다는 것 아닙니까?

◆ 전우용: 그러니까 전해지는 말로는 자기 집 100리 이내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하겠다는 가훈을 남겼다고 하죠. 이런 것들이 인정, 인도주의, 마음 속 깊이 있는 인간성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인류사가 겪은 문제죠. 부자들에게 가장 두렵고 걱정스러운 것은 수가 적다는 겁니다. 다수의 빈민이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이판사판으로 폭동을 일으켜서 부잣집을 습격하는 사례는 역사상 헤아릴 수가 없고요. 이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양쪽에 다 심각한 타격을 주기 때문에, 적정한 선에서, 사실 국가의 구휼제도나 지방 부자들의 빈민 구제라던가 이런 것들도 한 편으로는 갈등의 완화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신율: 어쨌든 기부라는 것, 나눔이라는 것이 겨울에 많이 생각나는데요. 구세군 있잖아요? 구세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는데, 구세군이 군, Army잖아요? 이게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온 건가요?

◆ 전우용: 1908년에 들어왔는데요.

◇ 신율: 이게 기독교의 특정 분파죠?

◆ 전우용: 네, 영국에서 1865년에 창설된 원리주의적인 선교단체죠. 특징적인 것이 편제라든가 선교활동을 아주 군사적으로 편성해서, 지역의 선교책임자는 사령관이라고 하고, 지구 책임자를 연대장, 대대장, 또 목사에 해당하는 분들을 정령, 부령, 이렇게 전부 군인 계급을 부쳤고요. 용어도 전쟁 용어를 써서, 헌금은 탄약이라고 하고, 선교계획은 작전, 선교행위는 전투라고 이름을 붙여서 썼습니다.

◇ 신율: 그렇군요. 그런데 구세군이 우리나라에 1908년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말씀하셨죠? 그때는 사람들이 헷갈려서 군대인줄 알았을 것 같아요.

◆ 전우용: 그게 더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가 일어났던 것이, 1907년에 한국 군대가 해산됩니다. 군대 해산되고 나서 6개월 뒤에 구세군이 들어오거든요. 구세군이 들어와서 사직동에서 처음 표교활동을 시작했어요.

◇ 신율: 지금 구세군회관이 있는 곳인가요?

◆ 전우용: 네, 그 부근에서 표교활동을 했는데요. 영어밖에 못하니까 한국인 통역을 두어서 했는데,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오해를 한 거죠. 구세군이라는 것이 영국 군대인데, 여기 들어가면 총도 나눠주고, 이게 신앙의 총을 말한 건데 실제 총을 생각한 거죠. 그래서 총도 나눠주고, 악과 싸워서 물리치게 해준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은 순수하게 성령적인 의미로 이야기한 것인데, 들은 사람들은 영국 군대가 총도 나눠주고, 그때 악이라고 하면 한국인들은 99%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이게 당시의 군대해산과 식민지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얼마나 목숨 걸고 분개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인데요. 그러니까 나는 목숨 걸고 싸우겠다, 총만 다오, 이런 심정으로 하루에 수 천 명씩이 입교해버립니다.

◇ 신율: 배신감이 좀 들었겠네요. 총 준다더니 총은 안 주고요.

◆ 전우용: 그걸 떠나서 일본군에서 당장 난리가 났죠. 그래서 바로 조사를 해봤더니, 양쪽에서 아마 합의한 것이겠죠. 일본에서는 통역이 농간을 부렸다, 구세군은 원래 그런 단체가 아닌데, 통역이 한국인의 배일감정을 이용해서 그렇게 했다,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입교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통역에게 수당 같은 것이 많이 들어왔을 수 있는데요. 당시 일본군 기록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통역들이 사실을 왜곡해서 전달했고, 그것 때문에 한국인들이 영국의 지원 하에 일본과 싸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목숨 걸고 군인이 되겠다고 들어갔다는 조사 자료가 나온 바가 있습니다.

◇ 신율: 그렇군요. 참 재밌는데요. 자선냄비 있잖아요? 이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입니까?

◆ 전우용: 그건 1910년대부터 등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정확한 년도는 모르겠습니다. 초기부터 구세군이라는 것이 세상을 구제하는 군대라는 뜻인데요. 이 구제라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빈곤구제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죠. 성령으로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뜻이었는데, 이런 것이 현실적으로 사람들의 느낌, 마음속에 와 닿게 하기 위해서 상징적인 장치들이 필요했던 것 같고요. 특히나 종교단체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빈민구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해서 1910년대부터 서울에 등장했던 것 같습니다.

◇ 신율: 그때도 명동이었나요? 그때도 명동이 도심이었을 텐데요.

◆ 전우용: 아니요. 명동이 도심이 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고요.

◇ 신율: 아, 그래요? 그러면 종로였나요?

◆ 전우용: 조선인들의 도심은 종로였고요. 일본인들의 도심은 충무로였는데요. 아무래도 종로보다는 일본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가 도심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구세군 당시에는 그런 것을 보기보다는 구세군사관학교와 구세군본부가 있는 사직동, 이쪽이 먼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 신율: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보면 주인공이 편지를 보내려고 하다가 우표 없이 크리스마스 씰만 보내서 반송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크리스마스 씰 말이에요. 이건 언제부터 생긴 건가요? 사실 이것만 봐도 크리스마스 기분이 나잖아요.

◆ 전우용: 덴마크에서 먼저 시작되었고요. 폐결핵 퇴치 자금을 모으는 거죠. 당시 19세기, 20세기 초까지 세계의 대도시들이 전부 스모그로 몸살을 알았어요. 석탄이 주요 원료였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요즘도 중국 일대에 스모그가 많은데요. 그게 결국 도시 주민들을 가장 심각하게 곤경에 빠트린 게 폐결핵이었거든요. 폐결핵은 근대 병이라고 해서 산업화 과정에서 창궐하는 병이고요. 우리나라도 일제강점 이전까지는 이런 병이 없었는데, 일제강점기 도시 산업화 이후에,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저임금 노동자의 영양실조와 겹쳐지면서 1940년경 까지 이 병은 별명이 만국병이었어요. 젊은이들이 많이 걸렸고요. 도시에서 일하다가 이 병에 걸리면 결국 농촌에 가서 쉬어야 하는데, 또 고향에다가 다시 퍼트리고, 이러면서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인데, 전국적으로 40만 명 이상의 환자가 있었고요. 이 병이 치료법이 당시까지 없었고, 잘 먹어야 하는데 가난하고, 치료비가 많이 드는 병이었습니다. 요즘에 암과 비슷한 질병인 거죠. 그래서 선교사들이 결핵 퇴치에 신경을 많이 썼고요. 그래서 해주곶의 요양원이라든가 이런 사설 요양원을 몇 군데에 만들었습니다만 항상 경비부족으로 문제였죠. 그러다가 셔우드 홀이라는 미국인 의사가 덴마크의 크리스마스 씰 제도를 알고서 조선에서도 이걸 발행해야 되겠다고 해서, 1934년 크리스마스에 처음 발행합니다.

◇ 신율: 그래서 씰로 모은 돈을 결핵환자에게 쓴 거죠? 그때는 적십자사가 있었나요?

◆ 전우용: 그렇죠. 우리나라 최초의 적십자사는 1905년에 만들어지고요. 그때 총재가 영친왕이고 그랬습니다.

◇ 신율: 그렇군요. 그러면 그때도 크리스마스 씰을 대한적십자사가 했나요?

◆ 전우용: 아니요. 대한적십자사도 아니고, 일본적십자사도 아니고, 이건 해주곶 요양원이 단독으로 발행했고요. 그리고 발행과정에서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이, 쇼우드 홀은 처음에 크리스마스 씰 도안을 가지고 고민했는데요. 많이 팔려야 하니까요. 처음에는 여기에 거북선을 그려 넣었어요. 거북선을 그리고 총독부 당국자와 협의를 하러 간 거죠. 그랬더니 총독부 당국자가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이건 절대로 허가 할 수 없다고 한 거죠. 그러니까 쇼우드 홀은 순수하게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게 한국인들이 거북선이라고 하면 다 좋아한다,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도 거북선 이야기가 나오고 이순신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번쩍번쩍 하는데, 이걸 하면 결핵을 퇴치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거부당하는 바람에 결국 남대문이 최초 도안이 되었습니다.

◇ 신율: 그렇군요.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죠. 고맙습니다.

◆ 전우용: 네, 감사합니다.

◇ 신율: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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