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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in news] 영화 '암살' 모티브된 '이봉창 의사', 나라 위해 목숨 던졌지만...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5-07-29 19:15  | 조회 : 7159 

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History in News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


- 일제강점기 10대 독립운동 당연한 일...
- 독서회 만들어 책만 읽어도 사상범으로 잡혀가
- 영화 <암살> 배경 1930년 대 상하이는 최고의 국제도시
- 3.1운동 이후 10대 초반도 독립운동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 신율 앵커(이하 신율): 여러분 영화 <암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개봉 7일 만에 4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바로 이 <암살>의 내용이 독립 운동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히스토리 인 뉴스에서는 독립 운동에 대한 이야기 다뤄보죠. 역사학자 전우용씨 스튜디오 나와계십니다. 안녕하세요?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이하 전우용): 네, 안녕하세요.

◇ 신율: 어제 나온 기사에 이런 게 있다고 하네요. 박경목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장이 수형 기록카드를 분석해서 논문을 썼는데, 수감자 대부분이 사상범이었고, 10명 중 1명은 10대였다. 이거 어떻게 보셨어요?

◆ 전우용: 특별한 내용이라고 보기는 어렵고요. 현재 방송 들으시는 애청자분께서는 너무 어린 애들까지 독립운동으로 잡아간 것 아니냐고 생각하시겠지만, 두 가지를 주목하셔야 할 것 같아요. 하나는 사상범이라는 것이 근대 국가에 존재할 수 있는 범죄자냐? 이게 별다른 게 아니고, 독서회, 아니면 출판물을 작성해서 뿌렸다든가, 그러니까 구체적인 범죄 행위라기보다는 그런 것들로 잡아넣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학생 비중이 높았고요. 두 번째는 10대라고 하는 나이가, 기대수명 평균 80세가 된 지금 생각하는 10대하고, 그 당시 10대하고는 전혀 느낌이 다르죠. 4.19만 해도 10대들이 일으킨 일이잖아요. 잘 아시는 것처럼 유관순 열사도 16세였고요. 3.1운동 때도 고등보통학교 정도의 10대 후반 청소년이 주로 했기 때문에, 실제로 사상범은 더 어린 나이, 13~14살부터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만주로 건너가는 사람이 나오던 시대이기 때문에, 특이한 현상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 신율: 그렇군요. 전 박사님 말씀을 들으니까 갑자기 드는 생각이, 1920년대, 3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평균 수명이 40대였어요. 그러니까 전 박사님이나 저나 그때 기준으로 하면 평균 수명을 훨씬 넘은 장수하는 사람들이죠.

◆ 전우용: 광복 70년이니까요. 광복 당시 40 넘는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70년 사이에 수명이 두 배 늘어난 것이고요. 인구는 그 당시 한반도를 합쳐서 3천만이었으니까, 인구도 두 배 늘어난 것이고, 엄청난 정도의 수명과 인구 증가가 있었던 것이죠.

◇ 신율: 제가 요새 그걸 실감하는 게, 20년 전에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80에 돌아가셨는데요. 그때는 희상이다. 오래 사시고 돌아가셨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요. 요새는 80에 돌아가시면 굉장히 아쉬워합니다. 그래서 참 많이 늘어난 것 같아요. 앞으로 10년 후에는 100살까지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어쨌든 10대가 독립운동에서 가장 행동적으로는 치열했던 세대였다. 이렇게 볼 수 있나요?

◆ 전우용: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불의에 참기 어려운 세대이긴 한데요. 그보다는 일제가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방식 자체가 죄인을 많이 양산하는 방식이었죠. 그러니까 근대법적 개념을 보면, 이게 민주주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행위가 없으면 처벌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단지 생각만으로도 불온한 사상을 가졌다든가, 그러니까 독립 사상을 가졌다든가, 또는 독립 사상을 고취할 우려가 있다면 이러한 것들도 처벌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실 한국의 특수성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최근까지 책을 소지했다거나 읽었다거나, 이런 것만으로 처벌되는 사례가 있었잖아요. 그게 치안유지법 자체의 잔재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1926년에 일제가 치안유지법이라는 걸 제정해서, 구체적인 행위나 행위에 관한 모의가 없어도 궁극적으로 그와 관계된다고 하면 처벌할 수 있게 법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식의 죄수들이 양산되었던 거죠.

◇ 신율: 박사님은 <암살>보셨나요?

◆ 전우용: 아직 못봤습니다.

◇ 신율: 이 영화가 1930년대 상해를 배경으로 했다고 하는데, 이때 상해가 어떤 분위기엿나요?

◆ 전우용: 거긴 국제도시였죠. 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였고,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세력의 아시아 진출 교두보였으면서, 유럽의 조계지역으로서 중국정부나 일본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요.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던 것은 거기에 영국, 프랑스인들을 통해서 외교운동을 하기 편하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이고요. 그리고 국내에서 간다면 인천항에서 배를 타면 상해로 직항하는 배가 있었고, 아니면 텐진을 거쳐서 가거나, 교통편도 굉장히 편한 편이었고요.

◇ 신율: 그런데 여기에 백범 김구와 약산 김원봉 선생님, 두 분이 여기서 활동한 모양이죠? 아무래도 임시정부가 있어서 그런가요?

◆ 전우용: 약산 김원봉 선생은 임시정부 활동은 나중에 합류했고요. 본래 국내에서 활동을 하다가, 대한광복회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그 단체의 제일 어린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망명을 해서, 3.1운동 이후에 조선의열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죠. 그런데 3.1운동이라는 것이 굉장히 큰 역사적 사변이었어요. 아시다시피 전국적으로 수 천 명, 수 만 명이 잡혀 들어갔고, 실제로 통계에 잡히지 않은 희생자들이 많았는데, 그렇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아버지이거나 형이거나, 이런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3.1운동 이후에 10대 초반인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중국으로 건너가는 사례가 생겨요. 원수를 갚겠다는 거죠. 이런 피 끓는 젊은이들을 새로운 독립운동 조직원으로 확보하게 되고, 또 그들의 그런 피 끓는 의지들이 바탕이 되면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게 되는 것이고요. 독립운동 단체 자체가 교과서에서는 의열투쟁이라고 하고 있고, 국제적 기준에서 보자면 테러리즘에 의한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게 된 것이죠.

◇ 신율: 김구 선생과 김원봉 선생의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 전우용: 둘은 라이벌 관계에 가까웠습니다. 임시정부도 30년대에 동력을 많이 상실하는데, 그 동력을 회복하는 겸, 사실 중국에서 활동하다보니까 아무래도 장개석 정부와의 관계가 미묘하게 작용했죠. 누구에게 지원받을지, 누구에게 지원할지, 이런 부분이 걸려 있으니까 다소 엊갈리는 부분이 있었고요. 그래서 의열단 활동이 악화된 다음에 김구 선생이 한인애국단이라고 하는, 역시 의열투쟁 단체를 만들죠. 의열투쟁이라는 것은 조선의열단에서 한인애국단으로 이어지고, 그 다음에 김원봉 선생이 임시정부 국무부장으로 나중에 참여하는 것이죠.

◇ 신율: 지금 박사님 말씀을 들어보면, 그 당시 독립운동 하던 분들 사이에도 이른바 계파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 전우용: 계파가 많았죠. 어느 나라나 그렇겠죠.

◇ 신율: 그렇죠. 계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계파는 청산의 대상이 아닙니다. 계파 패권주의가 있다면 그건 문제가 되겠지만, 계파끼리 건전한 경쟁을 하는 것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보루거든요.

◆ 전우용: 그럼요. 어떤 집단이든지 민주주의라면 이견이 존재하잖아요.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뭉쳐서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요. 그걸 배격하는 것이 문제인 거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서북파니 기호파니, 무장파, 문화파, 파로 나누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사회주의 계열도 있고요.

◇ 신율: 독립운동은 아무래도 사회주의 계열이 많았나요?

◆ 전우용: 꼭 그렇지는 않고요. 국내에서 사상범으로 단속했던 쪽이 그런 쪽인 거고요. 아무래도 젊은 층이 많이 하다보니까 그런 측면이 있지만, 국외운동이라는 것은 어디가 압도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 신율: 그리고 <암살>의 최동훈 감독, 이봉창 의사에게 필을 받아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는데요. 이봉창 의사, 유명하시죠.

◆ 전우용: 제가 직접 뵙지는 못했는데, 60년대까지 이봉창 의사의 친형이 살아계셨어요. 그런데 제가 성함을 잊었는데, 그분은 명함에다가 이봉창 의사 실형이라고 써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왜냐면 두 분 다 한인애국단이고, 한인애국단의 의거로는 이봉창 의사가 윤봉길 의사가 먼저에요. 그리고 이봉창 의사는 일본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졌고, 다만 폭탄이 불발탄이라서 실패했던 것이고요.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에서 일본 군 경축행사장에 폭탄을 던졌는데요. 일 자체의 경중으로 따지자면, 폭탄이 안 터진 것 말고, 이봉창 의사가 더 큰일을 했는데, 윤봉길 의사는 국가에서 기념관도 지어주고, 예유를 하는데, 이봉창 의사에 대한 예우는 너무 형편없다. 예우 좀 해 달라, 이런 소원을 가지고 계시다가 돌아가셨고, 아직도 기념사업회는 굉장히 초라한 형편이죠. 용산에 있는 생가에 작은 표석이 서 있는데, 용산에서 살다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상하이로 건너가셨던 분이죠.

◇ 신율: 그렇군요. 어쨌든 이런 영화를 계기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데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일제 잔재 청산, 아마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런 쪽을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독일 같은 경우는 ‘과거 극복’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우리는 과거 청산이라고 해요. 역사가 깨끗이 청산될 수 있는 존재일까요? 아니면 극복되어야 할 존재일까요?

◆ 전우용: 둘 다 가능한 개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청산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청장이라고 했어요. 장부를 다 쓰고 마감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나 기억, 경험이 일정 시간이 흐르면 현재와 거리를 두게 되는 거죠. 문서도 그렇잖아요. 몇 년 동안 행정에 참고하면서 옆에 두어야 할 문서가 있는가 하면, 몇 년이 지나면 잘 쌓아서 문서고에 보관해야 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들은 별 가치가 없어서 폐기하는 문서도 있고 그렇듯이, 우리가 역사 청산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의 어떤 사건을 완전히 역사화한다. 현재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정리하는 과정이 청산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극복도 사실 어떻게 보면 과거에 잘못했던 한계를 반성하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청산이나 극복이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어떤 역사적 사건 자체를 현실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러려면 그 사건들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확실히 정리해야 하는데, 그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에 청산에 실패했다. 아직도 현재의 일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신율: 외국 같은 경우에도 청산이 깨끗이 된 경우가 있나요?

◆ 전우용: 아주 고대사 같은 경우라면 청산이 된 거죠. 우리가 아직 조선시대 유교사상이 청산되었냐?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지금 그 잔재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미한 거죠. 이런 건 청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역사화라고 하는데요. 교과서에나 실리고, 누구나 거기에 크게 감정을 갖거나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어떤 역사적 사건은 그 사건 자체가 완전히 역사화 되어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죽은 역사가 되었다고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예컨대 일제 식민지배의 역사 같은 경우에는 해방이후에 그 당시 우리가 잘못한 부분, 그런 것들을 확실하게 정리하고, 관여자들이 확실하게 사과하고, 필요한 값을 치르고, 이랬다면 달랐겠죠. 예컨대 프랑스가 비시정권 하에서 나치 협력자들을 정리한 것,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을 기대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그런 감정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청산 문제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 신율: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전우용: 네, 감사합니다.

◇ 신율: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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