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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in News]국회가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다? 전근대적 발상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5-07-01 09:54  | 조회 : 3054 
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


History in News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



◇ 신율 앵커(이하 신율): 요새 정치권보면 참 다양한 생각이 들죠. 여야를 막론하고 당내 계파로 이렇게 치열하게 싸울 수 있구나,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오늘 히스토리 인 뉴스, 오늘 순서에서는 정치권이 과거에는 어땠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님 스튜디오에 나와계십니다. 안녕하세요?

◆ 전우용 한양대 동아시아문제연구소 교수(이하 전우용): 네, 안녕하세요.

◇ 신율: 요새 어떻게 보세요? 역사학자로서 정치 보면요.

◆ 전우용: 권력의 속성이 본래 독점욕이잖아요. 권력은 독점, 집중하려고 하는 것이고 그 폐단들이 워낙 컸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보면 그걸 분산시키려는 힘이 또 존재해왔고요. 그래서 그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아요. 다만 역사의 진보, 또는 발전 방향이라는 것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던 권한을 곳곳에 분산시켜놓고, 시스템화하고, 이런 것이 지난 3~400년 동안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는데, 그 시스템을 놓고 다시 갈등이 빚어진다고 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 퇴행 현상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신율: 그런데 박사님, 언제든 사람이 모여살면 권력이 발생할 수 밖에 없고, 권력관계는 항상 존재해왔는데요. 예전에는 어땠나요? 조선시대에는 붕당이라고 있었지 않습니까? 이 붕당끼리 권력관계, 이거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요?

◆ 전우용: 짧은 시간에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은 여러개로 분산되어 있던 권력을 하나로 모으는 과정이었죠. 삼한시대나 삼국시대 같은 경우에는 왕권이 오히려 취약했고요. 신라시대에 보면 화백회의라든가, 부족장이나 지방 호족들의 권한이 셌던 경험이 있었죠. 구체적으로 보자면 전제왕권이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게 조선시대 정도인데요. 그런 점에서 보자면 14세기 말에 중세 관료제 전제왕권, 이걸 만든 조선 왕조의 시스템은 세계사 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이른 편이었어요. 조숙한 중앙집권제니, 이른 관료제의 완성이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 상황에서도 왕권과 신권의 갈등은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방원, 왕자의 난, 그리고 세조가 자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던 계유정란, 이런 사건들이 단지 권력욕에 의해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고, 정치권력을 왕권과 신권, 어느 쪽에 비중을 두고 가져갈 것이냐? 권력을 어느 쪽에 더 많이 분배할 것이냐 하는 시스템, 체제의 싸움이기도 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정도전이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것이죠. 왕은 세습되는 자리니까 왕이 어진 사람이 될 지 포악한 사람이 될 지 예측할 수 없다. 왕이 권력을 독점하면 나라가 왕 개인의 캐릭터에 따라서 흔들릴 수 있다고 본 거죠. 그래서 왕의 권한을 가급적 축소시키고, 삼정승으로 표현되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권한을 강화시켜서, 이 사람들이 국가의 모든 정무에 대한 정무적 판단을 담당하고, 왕을 형식적으로는 자문 또는 조언하는 것이지만, 왕이 그에 따르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상했던 거죠.

◇ 신율: 왕이 시원치 않을 때를 대비한 것이군요. 세습되다보면 모자란 왕도 나올 수 있으니까요.

◆ 전우용: 그렇죠. 현실적으로는 정도전 자신이 실권을 쥐고 싶었던 측면도 있는 것이고요.

◇ 신율: 그런데 모자란 친구일수록 모든 걸 다 가지고 싶어해요. 능력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 권위를 더 내세우거든요.

◆ 전우용: 그래서 그 점에 있어서 이방원 같은 경우에는 마음에 안 들었던 거죠. 이게 누구의 나라인데 왕권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드느냐? 이런 것이 왕족 내부의 동의를 얻었던 것이고, 그 대표가 이방원이 된 셈이고요. 계유정란 역시 마찬가지거든요. 황보연이나 김종서나, 어린 왕이 왕위에 오른 상태였으니까 왕은 사실 아무것도 못하는 꼭두각시가 되었고, 국가권력을 정승들이 쥐고 흔드는 꼴이 되었으니까, 이걸 참을 수 없다고 본 것이 세조였던 것이죠. 사실 그렇게 왕권과 신권을 둘러싼 갈등은 조선왕조 내내 있었고요. 조선 후기에 보면 왕권강화책이 나오잖아요. 제도적으로나 법률적으로는 왕권이 최고에 있었지만, 실제로 운영되는 과정에서는 왕권이 허약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요즘으로 치면 권력을 집중할 것이냐, 분산시킬 것이냐? 또 집중이 된다면 이것이 왕이냐? 아니면 신하들의 협의체이냐? 이걸 둘러싼 갈등은 우리 정치문화에서도 굉장히 뿌리가 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신율: 네, 정도전이 아주 뛰어난 생각을 했던 사람이네요. 정도전, 정몽주, 이런 사람들이 다 친구였다면서요?

◆ 전우용: 일반적으로 고려 말 신진 사대부로 같은 부류로 포함되었던 사람이죠.

◇ 신율: 그렇군요. 그런데 권력에 있어서의 분산과 집중에 관한 문제, 그러면 정도전의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시스템적으로 왕의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생각했을 법 한데요.

◆ 전우용: 그게 조선초기 정치 시스템을 정하는 문제에서 굉장히 중요한 갈등내용이었죠. 왕권을 강화하고 싶은 사람, 그러니까 태종 같은 경우에는 그런 것을 굉장히 강조했어요. 육조 직계제다. 요즘으로 치면 각부 장관들이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시스템, 그래서 각부 장관들의 보고를 직접 받고 직접 지시하는 시스템을 왕권 강화론자들이 주장을 했고요. 정도전과 같이 신권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의정부 서사제라고 해서, 요즘으로 치면 각 부 장관들이 총리에게 보고를 하고, 여기는 총리 개인이 아니라 3정승이니까, 그들이 같이 논의해서 제일 좋은 안, 차선책, 이런 것들을 정리한 다음에 왕과 최종적으로 협의해서 결정을 내는 제도, 이런 식으로 두 개의 운영방법을 놓고 갈등을 했죠. 그래서 왕이 카리스마가 있고, 쿠데타로 집권했다든가, 이런 상황에서는 관리들의 의정부 서사제 요구를 묵살하고, 삼정승을 명예직으로 두고, 직접 다 처리하기도 했고요. 왕이 조금 귀찮거나, 의정부 대신들에게 눌리거나, 이럴 때는 의정부 대신들의 뜻을 따르기도 했고, 이건 운용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죠. 지금도 이런 시스템을 보면, 책임총리제냐, 아니면 총리가 단순한 얼굴마담이냐? 이걸 둘러싼 이야기와 비슷한 면이 있죠.

◇ 신율: 우리나라 헌법을 보면, 헌법상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받들어 보좌하고, 대통령의 명을 받아서 내각을 총괄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책임 총리라는게 저는 말장난이라고 봐요. 만일 책임 총리를 만들려면 법을 많이 바꿔야 되겠죠. 그런데 또 한가지는 뭐냐면, 붕당끼리 권력관계도 있죠?

◆ 전우용: 사실 붕당제도가 나온 게 선조 때부터 나오기 시작해서, 여러차례 동서남북을 기본으로 나누고, 그 다음에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을 나누고 했습니다만, 초기에는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죠. 그래도 죽고 죽이는 수준까지는 안 갔던 것이고요. 그런데 붕당 중에서 조선 후기에 잘못된 형태로 고착된 것이 인조반정 당시 서인이 주도한 반정이었거든요. 요즘 tv 드라마에도 나오고 있지만 광해군 정권은 북인 정권이었다고 이야기하고, 거기에 서인들이 집단 반발을 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인조반정인데, 그 당시 서인들이 내세운 내부적인 구호가 국혼물실(國婚勿失), 숭용산림(崇用山林)이라는 거예요. 국혼물실이란 왕비자리는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고, 숭용산림이라는 것은 명분으로는 사림들을 등용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당파 사람들을 요직에 넣겠다는 것이었는데, 숙종 때 남인이 잠시 우위에 섰던 상황이 일시적으로 있지는 했지만, 그 이후로 조선 말기까지,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의 일당독재 체제가 지속되었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는 비판, 반대, 견제가 용납되지 않으니까, 견재받지 않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이 권력의 또 하나의 속성이지 않습니까? 견재를 받지 않다보니까 조선 말기까지 내내 부패상이 되었던 것이고, 이것이 민심을 이반시키고, 결국 국망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 신율: 그렇죠. 그런데 이런 권력적 경험이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 제도적으로 변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 전우용: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죠. 사실 우리나라 최초의 의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해방 이전에 이미 독립협회 단계에서 1890년대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적 시위를 통해서, 왕을 압박해서 중추원 설립에 이르게 돼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의회에 해당한다는 것이고요. 이 목적 자체가 왕이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 다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전체 백성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입법권이나 왕권을 제약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게 처음에는 고종이 위세에 밀린 면도 있고, 명분에 밀린 면도 있어서 허용을 했지만, 의회가 지나치게 왕권을 간섭한다고 봤을 때는 가차없이 의회의 핵심인물을 체포해버리고, 단순한 자문기구, 아니면 왕이 벼슬주고 싶은 사람에게 명예직 줄 때 쓰는 기구, 이런 정도로 이용을 했죠. 그래서 중추원이라는 것이 초기에는 의회를 열망하며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왕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경험이 있고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도 중추원이라는 의회 격의 기구가 있기는 있었어요.

◇ 신율: 그건 친일파들이 들어가 있었겠죠?

◆ 전우용: 그렇죠. 조선인들에게, 너희들도 정치적 발언을 줄 기회를 주겠다는 형식만 주었던 것이죠. 그래서 해방 이후에 의회정치의 파행도 이런 경험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보거든요. 이승만 정권에서도 사사오입 개헌이라든가, 부산 정치파동을 보면, 국회를 그야말로 자기 들러리 역할로 만들어놓고, 만일 들러리 역할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법을 억지로 해석하거나, 폭력배를 동원해서 국회의원들을 구타한다든가, 이런 일들이 있었고요. 이런 식으로 국회가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다든가하는 표현 자체가, 현대 정치개념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이야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행태들이 많았죠. 대표적으로 국회가 대통령의 발목을 아예 못잡게 했던 것이 유신체제 아닙니까?

◇ 신율: 그렇죠. 그 당시에 유정회도 만들고, 그랬잖아요.

◆ 전우용: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지명한다. 이건 그야말로 고종이 중추원 의원의 반을 지명하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거랑 똑같은 시스템인거죠.

◇ 신율: 아, 그때도 그랬군요. 어쨌든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중에 아주 독특한 것이 뭐냐면, 새누리당은 새누리당 내부에서 친박과 비박 간의 갈등을 보이고 있고, 새정치민주연합 내에서는 주류 대 비주류의 갈등, 물론 뿌리를 찾아보면 친노 대 비노로 볼 수 있는데요. 어쨌든 이런 갈등의 뿌리는 어디인지, 계파는 어느 나라나 있습니다만, 여아 간의 싸움보다 계파갈등이 더 치열하잖아요.

◆ 전우용: 우리 경험이 다 그거죠. 처음 붕당이 있을 때는 동인, 서인만 있었어요. 그러다가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나뉘고,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나뉘고, 남인이 청남, 탁남으로 나뉘고, 이런 식으로 나뉘는데요. 예를 들어서 노론 소론을 보면 송시열과 윤증을 각각 따르는 무리였죠. 요즘을 따지면 친송, 친윤으로 볼 수 있죠. 이런 식으로 나뉜 경험이 있고요. 이거야말로 가장 상투적으로 하는 해석은 밥그릇을 둘러싸고 먹으려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나뉜다고 해석합니다. 이게 꼭 맞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면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신율: 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전우용: 네, 감사합니다.

◇ 신율: 지금까지 역사학자 전우용 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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