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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봉> 조선의 당쟁으로 바라본 우리 정당정치의 출구 - 강응천 문사철대표
작성자 : ytnradio
날짜 : 2014-09-16 09:55  | 조회 : 5030 
YTN라디오(FM 94.5)


[신율의 출발 새아침]세대와 시대의 봉우리를 넘어(세시봉) : 강응천 문사철 대표



앵커:야당이 자중지란에 빠지면서 정당정치가 표류하고 있습니다. 일본 우익은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강변해 왔는데요. 그들이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비웃지나 않을지 지레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당쟁이란 것이 과연 나쁘기만 한 거였는지 살펴보면서 정당정치의 긍정적 출구를 그려보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문사철의 강응천 대표 나와계십니다. 어서오십시오.강응천 문사철 대표(이하 강응천):네, 안녕하세요.

앵커:
당쟁, 우선 이게 사실 오늘날의 정당처럼 싸우는 형태는 아니죠?

강응천:
네, 지금의 정당이란 것은 명확한 조직이 있고, 구체적인 목표가 있고요. 무엇보다 대중정당이죠.

앵커:
그렇죠. 집단적 이익을 제도권 내에 반영하는 것이죠.

강응천:
네, 그런데 조선시대에 붕당이라고 하는 것은 대게 가문, 혈연으로 연결이 되고요. 일정한 사상가, 학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같이 갑니다. 지금과 같이 대중적인 정당이라고 보기는 어렵고요. 특정한 사대부 가문이나, 사대부의 지향을 대변하는 사람들이 서로 견해가 다르다보니까 나뉘게 되는 것인데요. 그런데 이것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조선 중기 이후에 사림들의 정치형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림이라는 것은 조선 건국세력의 일부이지만, 중앙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향촌사회에 내려와서 중소지주로서 향촌사회를 지배, 관리하던 세력인데요. 그들이 나중에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공신세력, 왕권과 결탁한 공신세력을 축출하고 조선을 자신들의 성리학적인 이념에 맞게 이끌어 가는데요. 이 사림들이 정국을 주도해서 이끌어 나가는 방법론이나 이념을 놓고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붕당정치라는 것이 형성되서 조선 중기 이후부터 대한제국까지 쭉 이어지는 것이죠.

앵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있어서 당이라는 것은 집단적 이익을 제도권 내에 투영한다기 보다는 철학적 방향성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논쟁을 했다는 건데요. 그러니까 애초에 그렇게 나쁜 건 아니죠. 철학적인 거고요.

강응천:
그렇죠. 서로 나눠져서 싸웠다는 것이 지금 정당정치를 놓고 보았을 때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가지고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 일본사람들은 그때 어땠습니까? 그 사람들은 아예 땅 덩어리를 서로 나눠가지고 서로 칼을 들고 싸우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에 비하면 굉장히 문화적인 정치행태였고요. 당쟁을 놓고 보면 시각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은 사림들이 나라의 정치를 주도하려다 보니까, 사람은 늘어나고 과거 합격자도 늘어나고 하니까, 자리는 제한되고 사림들의 숫자는 많으니까, 결국 자리다툼하다가 그렇게 갈라졌다는 설도 있고, 또 아까 이야기하신 데로 이념이나 사상 같은 것들이 명확하게 구별되었기 때문에, 나라를 이끄는 이념 자체도 차이가 났다. 뭐 이런 것도 있는데요. 어쨌거나 이들은 의리라는 것을 놓고, 서로 간의 의리를 내걸고, 높은 수준의 정치를 이끌었다. 이렇게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앵커:
사실 정치는 의리로 하는 게 아닌데요?

강응천:
그렇죠.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 의리가 성리학적인 의미는 요즘 말하는 의리하고 개념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의리라는 개념이 잘못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이를테면 홍명보의 ‘엔트으리’처럼, 아니면 김보성이란 텔런트가 의리라고 할 때, 그 의리는 보통 이렇게 보지 않습니까? 어떤 대의명분이나 객관적인 진실과는 다르게, 소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고, 제 식구 챙기는 이런 것이라고 보는데요. 원래 조선시대 붕당정치에서 내걸었던 의리는 것은, 여기서 ‘의’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늘의 이치에 맞느냐, 아니냐? 그래서 그 하늘의 이치를 ‘리’라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내가 추구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와도 맞을 때, 그것을 의리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주관적인 지향점이 하늘의 이치와 닿을 때만이 의리라고 했기 때문에, 주관성과 객관성이 일치되는 상태를 찾는 거죠. 그러니까 가령 지금 세월호를 놓고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지 않습니까? 야당 쪽에서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여당 쪽에서는 의회 정당정치에 따르면 그것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런 여당이 주장하는 의리가 있을 수 있고, 야당이 주장하는 의리가 있을 수 있는데, 둘 중에 어느 것이 진짜 공리에 맞는지 겨뤄보자. 이런 차원으로 나갔던 것이죠.

앵커:
네, 그러면 이때는 어떤 붕당들이 있었어요?

강응천:
붕당이 처음 생겨난 것은 임진왜란 직전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림정치가 선조 때, 16세기 후반부에 가가지고, 온갖 고초를 다 겪은 후에요. 그 유명한 사대사화라고 있지 않습니까? 선비들이 때죽음을 당했던.. 그런 고초를 겼은 후에 사림이 중앙정치를 장악하는데, 그러면서 조금 있다가 동과 서로 나뉘어져요. 원래 동인은 주도했던 사람이 서울의 동쪽에 살아서 동인이고, 서인은 서쪽의 정동 쪽에 살아서 서인인데, 나중에는 이게 나라 전체로 당의 갈림이 퍼져나가는데요. 재미있는 것은 전국적으로 놓고 보아도 동인은 동쪽인 영남지방, 서인은 주로 서쪽인 경기, 충청, 호남, 이렇게 분포가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동인은 퇴계 이황 선생을 사표로 삼고, 서인은 율곡 이이를 사표로 삼아서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는데, 흔히 우리가 1,000원짜리에는 이황선생이 있고, 5,000원짜리에는 율곡 이이 선생이 있는데, 우스게 소리로 이황 선생을 추모하는 분이, 왜 우리 선생이 더 훌륭한 분인데 왜 값이 싸냐? 그런 걸 가지고 따졌던데, 누가 그러더랍니다. 1,000짜리가 훨씬 더 많다고요. 그런데 아무튼 이 두 철학의 거두를 모시면서 두 당파가 형성이 되어 있다가, 나중에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고,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흔히 4색 당파라고 하는 것이 남인과 북인, 소론과 노론이고요. 그 다음에 남인도 청남과 탁남, 북인도 대북, 소북 이렇게 갈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는데요. 그건 정치가 분화되다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 분화 속에서 쭉 이어져 나갔던 것이죠.

앵커:
그러면 굉장히 분파가 많았겠네요?

강응천:
요새 그 계보를 가지고 탕수육 조재하는 방법가지고 당파를 인식하는, 그런 방법도 SNS에 떠돌던데요. 아무튼 굉장히 복잡한데 실재로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요. 큰 정치적인 흐름에 따라서 그걸 쉽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앵커:
네, 그럼 붕당과 관련해서 탕평이란 이야기는 어떤 의미입니까?

강응천:
요즘도 정치권에서 탕평이란 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정당, 당파간의 대 타협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 이야기로 들려지는데요. 탕평이라는 것은 원래 아주 오래된 말입니다. 중국의 고전 중에 서경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온 말입니다. 왕도탕탕 왕도평평이라고 해서 왕은 정사를 볼 때, 구부러짐이나 치우침 없이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을 고르게 대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니까, 보통 우리가 탕평이라고 하면 영조, 정조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런데 이것은 동양정치의 맥락 속에서 보면, 붕당론과 대립되는 것입니다. 붕당이란 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사대부가 정치를 주도하나가는 것이에요. 왕은 사대부를 통해서 정치를 펴고, 지금의 의회정치나 내각제 비슷한 체제에서, 사대부들이 붕당으로 나뉘어서 서로 경쟁하면서 정치를 주도하는데, 그러다가 이 붕당도 17세기, 18세기에 들어가면서 매우 치열하고, 서로 죽이는 데까지 이르니까, 영조 앞에 숙종 시대에 장희빈, 인현왕후, 이런 후궁이나 왕비까지 당파가 서로 어지럽게 전개되니까, 이러서는 안 되겠다. 왕이 중심을 잡고 각 붕당들을 제어해서 왕 중심으로 국가를 다시 이끌어가야겠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 탕평입니다. 그래서 탕평이란 것은 왕이 중심이 되어서, 그동안 조선을 나름대로 이끌어오던 사림들의 정치를 어느 정도 혁파하고 제어하고, 왕 중심으로 끌고 나가야 한다. 그러면서 당파들을 새로 헤쳐모여 시키는 것이죠. 그렇게 할 때 쓰이는 방법이 탕평이었었고, 그것이 영조, 정조를 거치면서 어느정도 성과를 갖교.

앵커:
그런데 지금 말씀 들어보면, 물론 이념적 방향성 때문에 갈리긴 했지만, 실제로 현실정치에 투영될 때는, 솔직한 이야기로 권력이런 측면도 배제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오늘날의 정당과 똑같은 거죠.

강응천:
그렇죠. 교수님도 서양정치사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영국에서 17세기에 토리당, 휘그당이 근대정당의 전신으로 논의되는데, 17세기 조선의 당쟁도 똑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토리당은 왕당파에 속해서 왕권을 보호하고, 휘그당은 왕권을 제한하자는 쪽으로 가는데요. 조선에서 벌어진 당쟁도 노론이 사대부 중심, 왕이나 사대부나 똑같고 왕은 또 하나의 사대부일 뿐이다. 이러면서 왕이 사대부의 여러 원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한 것이 노론이고, 남인 쪽에선, 왕과 사대부는 다르다. 왕은 특수한 존재이고 만인 위에 있는 존재로, 왕 중심으로 이끌어가려던 태도를 보이는 것들이, 지역은 다르고 정치논리도 다르지만 양쪽에서 비슷한 흐름으로 있었습니다.

앵커:
그리고 지금의 야당 상황하고도 비슷한 상황도 있을 수 있는 거죠?

강응천:
저는 잘 모르겠는데, 지금 야당 상황이라는 것이 여당에 기여했던 이상돈 교수라는 분을 영입하려다가 분란이 생긴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앵커:
누적의 결과이죠.

강응천:
네, 여러 가지가 누적되어 있는데, 이를테면 변신을 시도하면서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흡수해서 내부 계혁을 하려고 했던 움직임은 탕평 정국에서 있었던 것 같아요.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으면서 왕이 된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노론과 소론이 갈라져서 싸우고 있을 때,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된 사람이니까, 노론이 여당 입장에 서 있었을 거에요. 그런데 영조는 그 이전에 여당이었던 소론과 손을 잡고, 노론도 끌어들이면서 협력을 추구하게끔 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때 노론에도 강경파가 있고, 온건파가 있는데, 이거를 준론과 완론이라고 합니다. 소론 쪽에서도 역시 타협하지는 파와 강경파가 있는데, 소론에서 타협하자는 쪽이 탕평을 주도하면서 노론의 타협세력을 끌어들이는 시도를 합니다. 그걸로 탕평을 해 나가려고 하니까 양쪽의 준론이라는 강경파가 반대하고 난리를 치는거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영조는 아주 어렵게 탕평을 이끌어 갔습니다.

앵커:
탕평이라는게 원래 쉬운게 아니죠.

강응천:
그럼요. 붕당 간의 견해차이가 다른 것이 분명히 있거든요.

앵커:
네, 그런데 이렇게 때론 극심하게 갈렸던 당쟁, 이걸 궁극적으로 해결한 왕이 있어요?
강응천:
영조나 정조나 카리스마가 굉장히 강한 왕이었는데, 영조 때는 독단적으로 ‘나를 따르라’하는 식으로 무리하게 끌고 나간 면이 있는데, 그러다가 여러 가지 당쟁이 겹치면서 아들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그런 비극을 맞았거든요. 그런 다음에 우여곡절을 거쳐서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조는 왕이 독단적으로 하기보다는, 각 당파의 의리를 내 놓고, 공개적으로 공론에 부쳐가지고 서로 누가 옳은지 보자. 그러면서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조선에서 가장 똑똑한 성리학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논리를 내세워서 다른 세력들을 자신 아래로, 그러니까 내가 왕이니까 나를 따르라는 것이 안라 조목조목 따지면서 하나씩 자기 및으로 무릎꿀리는 그런 방식을 취해나가서, 정조 말년에 가게되면 거의 다 끌어들이는 정치권 대 타협을 이뤄낸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고요. 그런식의 탕평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시대에 누적되어왔던 모순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정치적인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우리가 흔히 대동법, 균역법이라고 하는, 사대부들이 스스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위기에 처한 조선의 엘리트 정치를 지켜낼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는데요. 대동법 같은 것이 양반이라고 해서 면제되는 것들을 없애고, 돈이 많으면 더 많이 세금을 내는, 이런 방식의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는 대 개혁을 100년에 걸쳐서 이뤄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도 정치권의 위기는 사실 이런 식으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뭐, 우리 정치권은 항상 위기니까요.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강응천: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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